[조선일보] 박완서의 친절한 책 읽기
작성자 : 마로니에(마로니에) 작성일 : 2008-07-10 오전 9:00:28 조회수 : 11388
죽기 전, 완벽하게 정직한 삶 살고 싶다
박완서의 친절한 책읽기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박완서·소설가

입력시간 : 2008.07.04 23:36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쓰셨다고 따님이 회상하는,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 북스)가 나왔다. 대하소설을 쓰신 분의 시집답게 그분의 시는 유장하고도 도도(滔滔)했다. 길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시라는 짧은 형식 속에 당신의 전체를, 그늘까지를 명주실꾸리처럼 최소한의 부피로 담아내신 솜씨가 놀라웠다. 아니 이건 솜씨로 된 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시가 와서 당신은 그냥 받아쓰기만 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꾸밈없이 자연스러웠다.

선생님을 알고 지낸 지는 30년 가까이 되지만 당시 나는 신인 시절이었고 그분은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을 때였다. 연령 차이는 벗해도 허물되지 않을 만큼 크지 않았지만 그분의 명성과 업적에 압도되어 허투루 친밀감을 나타내지 못했다.

조금씩 친해진 것은 원주로 가신 후부터였고 당신의 속마음까지 얼핏얼핏 비치신 것은 《토지》 완간 후 토지문화관을 만드시고 나서였을 것이다.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그분에게서 저 어른이 왜 저러실까, 내가 상상한 그분과 다른 면을 발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얼핏얼핏 들은 것 같은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는 당신이 어머니를 닮아 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꿈속에서 자주자주 어머니를 찾아 헤맨 얘기도 해주셨는데, 그때 들은 그대로 〈어머니〉 라는 시에 나타나 있다. 아무리 걸출한 여성에게도 어머니는 극복하고자 하나 극복되지 않는 악몽인 동시에 결국은 그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의지처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에 나타난 그분의 가족사, 그중에서도 모계혈통의 가족사는 내가 저분이 왜 저러실까,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그분의 그늘까지를 포함한 전모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존경에 더하여 우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목소리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스민 시는 〈일 잘하는 사내〉 라는 다음과 같은 시이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

이렇게 묻고 나서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순리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울었을 거라고 해석까지 해놓으셨다.

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으니까 다음 세상에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대신 내가 십 년만 더 젊어질 수 있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긴 있다. 죽기 전에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 그까짓 마당쇠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나 혼자 먹고살 만큼의 농사를 짓고 살고 싶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 세금 걱정도 안하고 대통령이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살고 싶다. 신역(身役)이 고돼 몸보신 하고 싶으면 기르던 누렁이라도 잡아먹으며 살다가 어느 날 고요히 땅으로 스미고 싶다.

시집을 덮으면서 나에게 온 생각이다.




기사 출처 :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4/2008070401384.html